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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47년만에 '무죄' 선고된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오늘 다음에 올라온 사회면 뉴스중 명바기의 뻘짓하는 기사에 묻혀있는 조그만 기사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사법부에 재심을 권고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에 대하여 47년만에 무죄판결을 냈다는 그것.

드라마나 책을 통해 대충의 현대사를 알고 있어도 그 시기의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잊지 않고서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이라고 하면 인터넷을 찾아보기 전에는 저게 무슨사건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내가 저 기사에 흥미를 가지게 된것도 마침 내가 읽고 있는 책인 한국 현대사 산책이라는 책의 60년대편에 기사의 저 사건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간단한 사건정리를 하자면 4.19 이후 갑자기 풀린 언론의 자유를 맞아 많은 신문들이 창간되었는데 그중 혁신계(지금으로 보면 개혁파)를 대표하는 신문이 '민족일보'였었고 조용수는 민족일보의 사장이었다.

그 당시 장면정권의 뻘짓으로 쿠테타가 발생하고 쿠테타의 주역이었던 박정희가 과거 좌익에 몸담았었다는 사실(박정희는 해방후 남로당 당원이었음)로 인해 혁신계는 이제는 뭔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를 걸게 되었었다.

민족일보 역시 그런점에서 초기 쿠테타를 지지하는 측이었지만 결국 박정희는 민족일보의 사장 조용수가 신문의 운영자금으로 간첩공작원의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붙여서 민족일보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구형하고(7명은 결국  감형을 거듭해 석방) 그 중 사장인 조용수를 사형시켰으며 민족일보의 자산은 모두 압수 해버렸다.

지금의 정설은 당시 박정희가 쿠테타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던 미국이 그의 과거 이력(남로당)으로 인해 쿠테타를 인정하지 않을까하는 걱정끝에 반공이라는 기치아래 희생양을 찾았으며 그중 하나가 대표적인 혁신계 신문이었으며 당시에 '통일'이란 문제를 다루고 있던 민족일보를 그  희생양으로 삼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형집행은 8명중 사장인 조용수에게만 이루어졌으며 나머지 사형수 7명은 나중에 박정희 치하에서 주요 공직을 거쳐갔으니 그게 실제 간첩이거나 북한의 공작금이었을리는 만무하며 사건을 과장되게 조작해서 가져다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은 박정희가 자신의 좌익경력(사실 이 부분도 역사에 보면 그가 뚜렷이 사상이 그 쪽이었다기 보단 박정희가 보기에 그 시절 좌익이 정권을 잡을것으로 판단하고 줄타기를 한것에 가까움)을 세탁하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많은사람을 빨갱이로 모는 과정(거의 모든 진보성향의 단체들을 해산하고 공산주의자로 가두는)에서 보여진 이른바 시범케이스에 가깝다.

광기가 지배한 40-60년대를 거치는 동안의 우리나라 현대사를 읽고 있노라면 물론 시대의 흐름상 어쩔수 없는 환경이 있을만도 하겠지만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국가의 중추에 있던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된 판단력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진한 의구심이 든다.

내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그 시절 우리의 과거들을 책으로나마 들여다 보면 그 과거의 일들이 현재에 와서까지 우리들에게 은연중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수 있다.
만일 우리 아이가 무언가를 이해 할때쯤 되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우리의 과거역사에 관한 책부터 읽어보라고 권할것이다.

PS. 찾아보면 조용수 사건과 관련해서 반가운(?) 이름인 이회창씨가 등장하는 이유는 이 시절 조용수등에게 사형을 언도한 혁명재판부의 3인 재판관(?)중 한명이 이회창씨이기 때문이다.

책에 나온 이회창씨의 변명을 그대로 옮기면

자기는 그 시절 막 군재판부에 들어온 신참시절이었으며 쿠테타 측에서 혁명재판부에 재판관을 차출해가는데 자기보다 고참들이 모두 그 사건에 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갔다는 것이다.

뭐 그시절 그 재판에서 감히 다른 판단을 내릴 환경이야 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법이라는 최후의 정의를 지키는 법관이라는 사람이 사람목숨을 가지고 그런식으로 처리하고 지금와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내면 안되지~

어서 지금이라도 유족들에게 사과라도 하시길(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어지지는 않는 인간 대나무께서 뭐 그럴리야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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